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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피로사회 - 피로함이 만드는 느슨함. 그리고 그 속의 희망Books 2022. 8. 18. 21:26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독일에서 활동하는 문화비평가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아무래도 정보가 많지 않은데, 한 기사를 보면 막말 논란이 있기도 했다. 한병철의 저술 시리즈로서 처음으로 번역이 되었던 본 책에서 한병철은 현대의 사회를 긍정 과잉의 사회로 진단하고 부정성이 주는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한병철은 현대사회의 '피로함'에서 그 희망을 찾는것으로 보인다. 이하는 한병철의 책을 단순하게 요약한 내용이지만, 끝까지 읽는다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타인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갈까하는 고민과 관련한 몇몇 시각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경성의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21세기는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그 공포를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신경증적 시대(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로써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이는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며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다. (따라서 이질성 혹은 타자의 부정성을 제거하거나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면역학적 담론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이질성이 아무런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 되면서, 면역학적 담론의 조직과 방어의 도식으로 파악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후기근대적(포스트모던) 차이는 더이상 면역학적 반응. 병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써 관광객이 향유하는 대상이 된다. 관광객과 같은 ‘소비자’는 더 이상 면역학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민자들 조차 오늘 날에는 현실적 위험으로써 두려움을 느껴야 할 그런 강한 의미의 이방인, 또는 면역학적 타자라고 할 수 없다. 이민자나 난민은 위협이라기보다는 짐스러운 존재로 여겨질 뿐이다. ‘탈경계 과정(이질성과 타자에 대한)’은 오늘날 문화이론적 담론뿐만 아니라 오늘의 생활 감정 자체까지도 지배하고 있는(즉 삶의 모든 영역을) 혼성화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성의 변증법(자발적으로 약간의 타자/이질성을 받아들이고 치명적 위협이 없이 자기를 주장하는) 에서 자아는 자아를 부정시키고 파멸시키는 타자를 부정함으로 자기주장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긍정성의 변증법’을 따르고 있다. 우리는 이질성이 실종 된채로 살고 있는 것이다. 긍정의 과잉의 시대에서 우리는 ‘신경성 질환’을 겪는다.
폭력은 이질적인 것, 낯선 것(타자성 이질성) 뿐만 아니라, 같은 것(차이가 있지만)의 비만 상태에도 존재한다. 과잉의 상태로 인류에게 보편화된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과잉을 일으키는 상태는 바이러스적이지 않기 때문에 (면역 저항력의 저하의 상태를 만든다기 보다는 혹은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한 적대성의 계보학적 이라기 보다는)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내재성의 테러로써)으로써 포화와 고갈의 상태를 만들며 신경성 질환으로 나타난다.
이는 긍정성의 폭력으로써 시스템적인 폭력으로써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이런 긍정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이 나타난다. 또한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히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 되며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 보다도 눈에 덜 뛴다. 긍정성의 폭력이 일어나는 곳은 부정이 없는 동질의 공간, 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대체 되었다. 21세기 사회는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주민’은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가 되었다. 규율사회가 금지, 명령, 법률로 부정성을 갖고 있었다면 성과사회는 이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으로 대체했다. 그리하여 규율사회의 부정성이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냈다.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분명 생산을 최대화 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 이에 생산성이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규율의 기술이나 금지라는 부정의 도식은 ‘성과의 패러다임 혹은 할 수 있음’이라는 도식으로 대체 된다. 그러나 성과사회의 주체들은 규율에 단련된 상태를 졸업했을 뿐이다.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향상은 당위와 능력 사이의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알랭 에랭베르는 우울증을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하는데, 권위적 강제와 금지 그리고 규율적 행위를 하는 조종의 사회에서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에랭베르는 우울증을 ‘자아의 경제’라는 점에서만 살펴본다. 즉,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 또한 우울증의 원인이라고 이야기 한다.
나아가 저자는 성과사회에 내제하는 시스템의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일으킨다고 정의 한다.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라기 보다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고 보는 것이다.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니체가 이야기한 주권적인간으로써의 초인이 아니라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으로써 긍정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그렇게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그는 가해자이며 동시에 피해자 이다.
우울증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신이 주인이자 주권자이라는 점에서 복종적 주체와 구별 되지만,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고,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로 역설적 자유로 이어진다. 그것은 착취로써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적 자유는 심리적 질병(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로써의)으로 이어진다.
깊은 심심함
저자는 긍정의 과잉이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주의구조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러면서 '멀티태스킹'이라는 주의 관리기법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으로서 수련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 나타난다고 이야기 한다. 그렇게 최근의 사회적 발전과 주의구조의 이런 변화는 '성공적인 공동의 삶의' 자리를 생존에 내어주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또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이 깊은 사색주의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과잉주의에 의해서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발터 벤야민의 '깊은 심심함-경험의 알을 품고있는 꿈의 새-정신적 이완의 정점'과 반대되는 활동 공동체의 시대가 지금이라는 것이다.
이 '사색주의와 깊은 심심함'은 데카르트 주의에 의해서 '회의'로 대체 되는 경향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그리스의 철학자와 니체가 언급한 '관조'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조는 '조작 불가능성과 사물들의 존재 방식'을 사색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말한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깐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없었다고.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성격교정 작업이라고 주장한다.
활동적 삶, Vita activa
한나아렌트의 ‘활동적삶’에서그녀는활동적삶을행동의우위와연관지으면서새롭게정의하고스승인하이데거처럼영웅적행동주의를옹호한다. 그녀에게 ‘행동의 가능성’은 탄생을 지향하고, 행동의 영웅성을 더욱 강조한다. 한편, 그녀에게 기적은 인간의 탄생 자체로써 ‘행동하여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의 자리에 행동이 대신 들어선다.
아렌트는 근대사회가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어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시킨 노동사회라 정의한다. 행동이 능동적으로 새로운 과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라면 근대의 인간은 사유, 제작과 행동을 아우르는 활동적 삶의 모든 것이 ‘노동’화 되어 버린다. 이는 결국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귀결 된다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아렌트의 진단 - 근대가 낳은 노동하는 동물 - 에 반대한다.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익명적 삶의 과정 속에 용해되어버릴 만큼 자신의 개성이나 자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있다고 지적한다.
책의 제목으로 부터 일관되게 저자는 우리가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의 상태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노동이 적나라한 활동이 되고 노동은 벌거벗은 생명과 대응하는 활동이라고 한다. 그리고 탈서사화로 허무의 감정이 강화된다고 한다. 위와 이유로 사람은 ‘건강’ 즉, 벌거벗은 생명 자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강박이 생겨난다고 한다.(니체의 예를 든다) 한편, ‘호모 사케르’는 원래 어떤 범죄로 인해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로써 저자는 우리가 호모 사케르의 삶보다 더 많이 벌거벗겨졌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호모 사케르는 포로 수용소, 난민, 중환자실의 환자들 같이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생명이다. 저자는 후기근대의 ‘성과사회’가 우리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킨다면이라 가정하면 모두가 ‘호모 사케르’라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고 이야기 하면서 ‘사케르’라는 단어가 ‘신성한 것’이라는 것을 근거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그는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를 강제수용소의 무젤만에 비유한다.
한편, 저자(한병철)는 한나아렌트의 ‘활동적 삶’의 마지막에서 다루고 있는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와 ‘사유의 힘’에 호소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활동의 경험을 가장 순수하게 드러내는 이 ‘순수한 사유’가 후기근대적 성과사회의 활동과잉과 히스테리를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아렌트가 활동적인 삶과 사색적 삶을 다루며 언급한 ‘카토의 사색적 삶의 고독’이 아렌트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행동하는 인간의 힘’과 연결 되는 것에 다소 무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아렌트는 ‘활동적 삶’의 마지막에 가서 키케로가 사용한 것이었는데, 이는 결국 사색적 삶에 대한 긍정을 통해서 ‘광장과 북적대는 군중에서 벗어나 사색적 삶의 고독 속’으로 돌아가는 사색적 삶을 긍정해버렸다고 주장한다. (이는 ‘영웅적 행동’과의 연결점이 다소 적어지는 결론이라는 것을 암시하는듯하다) 더불어서 저자는 아렌트가 ‘근대적 활동사회’에서 사색적 능력이 상실되는 것이 무엇보다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련이 있고,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는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보는 법의 교육
저자는 본 챕터에서 사색적 삶이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니체가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고상한문화를 목표로 하는) : 보는 것, 생각하는 것, 말하고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강화한다. 그리고 니체가 보는 법을 배운다고 이야기 했을 때 그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 교육’으로써 모든 것을 긍정하는 수동적인 자기 개방이 아니라,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고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중단하는 본능을 발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통해주체적으로 자극을 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한편, 저자는 이 대목에서 다시금 아렌트를 언급하는데, ‘활동적 삶’의 활동성이 사실상 활동과잉으로 치닫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활동성의 변증법을 인식하지 못한것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저자는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한다.
돌아와서 저자는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것은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로써 ‘머뭇거림’으로 표현되며, 이런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보게하고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데 필수 불가결하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저자는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을 잊고 있다고 말한다. 분노는 특별한 시간적 특성을 갖고 있어서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짜증과 구별시킴) 즉,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
한편, 저자는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인데, 이는 분노와 짜증과의 관계와 유사하다 이야기 한다. 분노는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분노는 예외적 상태이다. 이어서 저자는 아감벤은 긍정성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함을 지적한다. 예외 상태가 한계를 이탈하여 정상 상태가 되어간다는 그의 진단과는 반대로 흘러가는 현재 사회가(긍정의 상태) 모든 예외 상태를 흡수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아가 ‘정상 상태가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주장한다. 따라서 저자는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 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점차 자폐적 성과기계로 변신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과도한 노력이 방해가 되는 부정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다시금 니체를 이야기 한다. 니체의 말을 빌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인 부정적힘은 무력함이 아니라(=무언가를 할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능력이 없어 종속되 버려 무언가를 긍정하기 까지 하는 긍정을 넘어서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부정적 힘이 없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게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치명적인 과잉 상태에 빠지지 않고 돌이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저자는 ‘무위의 부정성은’ 긍정성과 달리 사색의 본질적 특징이라 말한다. 그리고 무위가 스스로를 해방하는 것이고,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고 말한다. 이는 수동성과 관계 없이 참선처럼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과 같다고 이야기 한다.
바틀비의 경우
이 장에서 저자는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의 병리학적 독해를 시도한다. 이 단편에서 ‘월가의 이야기’가 묘사하는 것은 모든 주민이 노동하는 동물로 전락해버린 비인간적 노동 세계이다. 멜랑콜리와 우울이 이 소설에서 매우 자주 거론되고,, 변호사의 조수들은 모두 신경성 질환에 시달리고, 과도한 공명심을 가진 조수 ‘니퍼’는 심리적/육체적 원인에서 오는 소화불량으로 고통 받는다. 그리고 신경증적인 과다활동성과 과민함을 드러내는 이들 인물은 침묵하며 돌처럼 굳어 있는 바틀비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
바틀비는 신경쇠약의 특징적인 증상을 보인다. 그는 무위의 부정적 힘이 아닌 ‘정신성’에 본질적인 중단의 본능을 표현하지 않고 아무런 의욕도 없는 무감각 상태의 징후를 보인다. 그는 결국 그러한 의욕 상실과 무감각으로 몰락한다고 내용을 정리한다. 저자는 멜빌이 묘사하는 사회가 아직 규율사회라 정의한다. 복종적 주체로써 우울증의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열등감, 실패에 대한 불안, 그리고 너는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후기 근대적 성과사회의 특유한 명령에 부딪힌 흔적이 바틀비에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그저 필사를 할 뿐이고 우울한 자아-피로를 초래하는 과중한 자아의 부담을 알지 못한다.
한편, 저자는 여기서 이 장 서두에서 언급한 ‘필경사바틀비’를 신학적으로 독해한 이가 바로 아감벤임을 이야기하면서 사실 아감벤의 바틀비에 대한 ‘존재 신학적 해석’은 소설 자체의 이야기와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특히 이 해석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심리적 구조의 변동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감벤의 해석은 바틀비를 순수한 잠재력의 형이상학적 형상으로 승격 시킨다. 바틀비를 철학적 지형에 있으며 쓰기를 중단한 글의 전문가로서 모든 창조의 원천인 ‘무’를, 무의 가차 없는 요구를 체현하는 극단적 형상으로 정의한다. 즉 아감벤은 바틀비를 정신, 순수한 잠재력의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아감밴의 해석은 바틀비의 피로하고 흐릿한 눈이 이미 그가 신적인 잠재력의 순수성을 체현하고 있음을 반박하며, 바틀비가 어떤 심부름도 하지 않으려한다는 사실을 잊었다고 이야기 한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바틀비의 실존은 죽음으로 향하는 부정적 존재로 정의하고 아감벤이 이야기한 제2의 창조의 선포자, 틀창조의 선포자라는 해석과는 모순된다는 주장을 한다. 그리고 아감벤이 하늘도 풀도 메시아적 표징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하며 그것은 그저 죽음의 왕국 한 가운데 유일한 생명의 신호로 남아있는 작은 잔디밭으로써 그저 희망 없는 허무감을 강화한다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삶의 심부름에 따라 이 편지들은 죽음을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가 이 소설의 중심메세지일 것이라 추측하며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이 죽음으로 귀결 된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저자는 카프카의 ‘단식곡예사’의 이야기를 덧 붙인다. 특히, 단식곡예사가 죽는 장면을 말하는데, 그가 죽었을 때, ‘..곤련된 사람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 남은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어린 표범이다..’ (여기서 어린 표범은 맛있어 하는 먹이를 먹게 되고 자유조차 그리워하지 않는, 생에대한 기쁨이 표범의 아가리에서 매우 강력한 열기와 함께 뿜어져 나온다는 식의 표현으로 묘사 된다.) 그런데 이 소설에 등장한 단식곡예사에게 자유의 감정을 주는 것이 오직 ‘거절의 부정성’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자유의 감정이란 표범이 ‘이빨 속에’ 감추어두고 있는 자유만큼 가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결론짓는다.
‘..바틀비에게도 표범의 고깃덩어리처럼 보이는 ‘미스터 커틀릿’이라는 짝이 있다. 그는 과도하게 열을 내며 자기 동네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고 바틀비에게 식사를 권유해본다. “여기가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선생님. 땅도 널찍하고, 아파트들도 멋지죠, 선생님 우리하고 한동한 함께 머무르시면 좋겠어요. 마음을 붙이려고 애써보세요. 커틀릿 부인과 제가 선생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기쁨을 누려도 좋을까요? 커틀릿 부인의 사실에서요.” 바틀비가 죽은 뒤 변호사는 놀란 미스터 커틀릿의 물음에 거의 반어적 어조로 대답한다. “잠든 거죠, 그렇죠?” 왕들과 고관들과 함께요.” 나는 중얼거렸다..’ 이는 메시아적 희망을 향해 열려 있지 않다고, 바틀비의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라는 상용구가 결코 기독교적/메시아적 의미로 해석될 수 없다고. 즉, 이 월가의 이야기는 탈진의 이야기며, 소설의 마지막 대사가 한탄인 동시에 고발이라고 말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피로사회
‘피로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모리스 블랑쇼’의 이야기가 제목 아래 적혀 있는 이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가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도핑은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성과사회에서 도핑은 공정성 즉, 모두가 그런 약을 똑같이 구할 수 있기만 하면 허용이 된다. 이런 도핑은 사회적 발전 경향의 결과로써 이런 사회적 변화 속에서 생명 기능과 생명 활동으로 환원되고 만다.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그러나 이런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성과사회의 피로의 특직은 고독한 피로라는 것이다. 한트케의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 바 있는 그 피로다. 이 분열적 피로는 오직 자아만이 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폭력적인 피로다. (폭력을 낳는 피로) 한트케는 이런 폭력적인 피로의 대립자로 말 잘하는,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를 내새운다. 이 피로는 자아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틈새를 열어준다. 남을 동시에 나로 여기게 한다. 그리고 틈새는 친절의 공간, 무차별성의 공간이다. 자아가 줄어들면서 존재의 중력은 자아에서 세계로 옮겨간다. 한트케의 피로는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다. 그것은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에 새어 들어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또 스스로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피로이다. 이런 피로를 통해 비로소 머물러 있는 것, 한 곳에서의 체류가 가능해 진다.
한트케는 이런 ‘근본적인 피로’ 위에다 사라져 버린 모든 생존과 공존의 형식을 모아들인다. 근본적 피로는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 된다. 그것은 영감을 주고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이 피로 속에서 오히려 특별한 시각이 깨어난다. 한트케는 ‘눈 밝은 피로’라고 이 피로를 부른다. 나아가 한트케는 ‘깊은 피로’를 치유의 형식, 더 나아가서 회춘의 형식으로 승격시킨다. 더불어 한트케는 노동하는, 움켜쥐는 손에 놀이하는 손을 맞세운다. 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고, 사물들은 더 불분명해지고 더 개방적으로 되면서 확고한 성질을 다소 잃어 버린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무차별성으로 인해 우애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러한 피로는 깊은 우애를 낳고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한트케는 이러한 개별적 공동체, 개별자들의 공동체가 네덜란드의 정물화 속에 예고되어 있다고 본다. 그 정물화에는 꽃들 곁에 여기는 딱정 벌레, 등이 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다른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의 순간 속에서만큼은 모두가 나란히 함께 있는 것이다. 한트케는 이를 ‘우리-피로’라고 말한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 간다. 그러나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이는 막간의 시간이다. 이 막간의 시간은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이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한트케는 내재적 성격을 지닌 피로의 종교를 구상한다. ‘근본적 피로’는 자아의 논리에 따른 개별적 고립화 경향을 해소하고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그 속에서 어떤 특별한 박자가 일어나 하나의 화음을, 친근함을, 어떤 가족적 유대나 기능적 결속과도 무관한 이웃관계를 빚어낸다. 피로는 흩어져 있는 개개인을 하나의 박자 속에 어울리게 한다.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한트케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언제나 피로한 상태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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