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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와 얼굴, 이슬아Books 2023. 7. 5. 01:34
이따금씩 영화나 책, 그림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하는 생각들이 있었는데, 완성도랄까(?) 그런 것을 고민하면서 글을 쓰는 것을 주저했었다. 물론 에너지를 내서 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러다가 최근에는 글을 쓰지 않으면 뭔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고, 나는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얼굴이라는 책에 대한 글을 적고 있다. 하하 (웃음을 표시하는 말을 쓰는 것이 갑작스럽지만 나는 잠시 멋쩍은 느낌이 들어버렸다). 술을 거의 두달 만에 좀 많이 먹고 잠시 잠에 들었다가 나는 지하철에 한시간 가량 몸을 맡겼다가 역을 하나 지나쳤고, 고민하다가 스터디 까페에 들어와서 커피에 얼음을 잔뜩 우겨 넣고, 이슬아 작가의 책 날씨와 얼굴들을 잠시 추가로 읽고서는 결국 아이패드를 꺼내들고 글을 적게 된 상황이기에 약간의 웃음이 날 수 밖에 없다.
내가 이슬아 작가의 책을 구매하게 된 것은 인스타에서 본 이슬아 작가의 모습 때문이었다. 나는 이슬아 작가가 그저 개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감각적인 패션과 인스타 좋아요의 숫자. 다른 인스타 셀럽에 비해서 많은 수는 아니지만, 글 쓰는 작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인기가 많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정도였다. 지극히 소비적 태도로 구매하게 된 이 책을 나는 일반적인 책을 읽는 습관 대로 노란색의 스테이틀러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임의의. 또는 노란색의 가로 지향의 선이 텍스트를 선명하게 만들어 내는 불규칙한 궤적은 나에게 항상 짜릿한 일로 다가 오는데, 그것은 나의 생각이나 잠재되어 있던 어떤 것, 혹은 자극하는 어떤 것이 하나의 실체를 지니게 되기 전단계를 의미하게 때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직 정신의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나의 인생에서 어떤 형태로든 실체를 지니게 될 것이다. 나름의 서사나 역사가 되는.
여튼,
보통의 책을 읽을 때에는 노란 형광펜과 다색의 블랙펄 색연필만을 사용하는 나로써는 이슬아 작가의 글에서 때로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을 표시하기가 어려웠다. 분석적 읽기를 시도할 때 처럼 마구잡이로 필기하고 연결지으며 정연한 글에 나의 의식을 마구잡이로 쏟아 놓지 못한 아쉬움을 느꼈다. 얇은 두께. 텍스트에 노란 색을 더하는 재미를 좋아하는 나지만, 그저 회색의 톤을 갖고 있는 책에 노란 물을 들이는 것이 아쉬워지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아쉬운 감각 뒤에는 어떤 설렘이랄까. 두근 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쉽게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 책도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뜬금 없지만, 나에게는 이러저러한 의미가 있었던 부분을 남겨 본다.
1.
특정한 단어를 언급하지 않고도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날 글쓰기 수업에서 나는 어린이들에게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골라달라고 요청했다. 어린이들은 주섬주섬 자기 취향의 이미지를 들고 왔다. 사람일 수도 있었고 동물일 수도 있었고 물건일 수도 있었다.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써 보자고 제안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과 비슷한 서술 방식을 연습하려는 의도였다. 글을 완성한 열두 살 서영이가 사진을 가린 채로 자기 문장을 읽어 주었다.
부글부글 나오르는 불을 상상해봐. 불은 말이지, 아주 뜨겁고 때로는 위험한 거야. 무언가를 강요하는 듯한 색깔이기도 해. 왜 그런 거 있잖아. 엄마가 화나면 튀어나오는 색 말이야. 하늘에 그 색깔이 있는 거야 그런 걸 '노을'이라고 불러. 지금 네 앞에는 귤이 놓여있어. 귤을 만져봐. 그런 걸 둥근 모양과 합치는 거야. 이 모든 것은 매우 매우 커. 크다는 건 뭐냐면 .. 너의 집을 떠올려 봐. 아무리 작아도 너 보다는 크겠지. 하지만 이것은 집보다도 몇만 배 넘게 커. 어마무시하게 거대한 거지 이게 있어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어.
@이슬아 '날씨와 얼굴들' p136 부터 시작 되는 '가릴 수 없는 말들' 초반부
2.
당신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을 나열해보겠다. 당신은 무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당신의 가족과 나라가 얼마나 가난한지. 당신이 번 돈 중 얼마를 원가족에게 송금하는지. 어떤 사람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반말로 말을 건다. 당신은 새 가족에 편입되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이름을 잃는다. 당신은 낯선 기후와 낯선 음식에 적응해야 한다. 낯선 한국어에 적응하는 일에 비하면 그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짐을 푼 곳에서 당신의 모국어는 배제된다. 당신은 며느리가 되고 높은 확률로 엄마가 된다. 아이는 주로 한국어만을 배운다.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당신 빼고 모두 한국어를 쓰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에 대해. 이 나라와 저 나라에 대해. 그리고 삶이라는 것에 대해. 더 잘 말해주고 싶은데 그러기가 어렵다.
@이슬아 '날씨와 얼굴들' p84 부터 시작 돠는 '이주여성이 마이크를 들었다' 초반부
책임감 없이 읽히겠지만, 이상의 글은 지극히 충동적이고 개인적인 이유에서 밑줄을 그었기 때문에 발췌한 부분을 읽으면서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 오작동이겠지만, 사실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얼굴들의 이런저런 문장에 밑줄을 그으면서 나의 뇌는 쾌락을 느끼는 영역이 반응하도록 지시했음이 분명했다. 이는 내용이 진지하고 때론 슬플 때도 있지만, 내용을 표현하는 문체가 수려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텍스트 자체가 주는 자극 때문에 느끼는 쾌락을 자세히 서술하면 할 수록 아마도 .. 누군가의 슬퍼 우는 모습을 보며 쾌락을 느끼는 이상한 사람이 그려지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생길 정도다.
한편,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얼굴들에 대한 생각을 적으면서 나는 더 글로리를 떠올렸다. 이 책이 복수의 이야기는 분명 아니지만, 책을 읽으며 쓰여지지 않은 가해자들을 볼 수 있었다(내가 그 가해자일 때도 있었다 .. ). 그리고 작가 본인이 세워둔 날씨와 얼굴이라는 큰 개념의 내연을 채우는 이슬아 작가의 덤덤한 문체와 이야기는 문동은과 문동은의 몸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에 얽힌 서사를 보는 것 처럼 읽히기도 했고, 책 속에는 어떤 잔인한 표현이나 증오의 표현이나 고발의 표현이 없었음에도 더 글로리의 그 가해자들을 서서히 응징해 나가는 이야기를 보며느낀 카타르시스를 .. 정화의 감각을. 나는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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